출가 수행자들에게 왜 꼭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종 종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이 어지럽고 힘든 사회에서 벗어나 공기좋고 물좋은 산속에서 조용히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답답하고 무기력한 존재들로 보이나보다. 하루 하루 힘든 현실과 마주하여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우리와는 달리 힘들게 업종에 매달리지 않고 경치 좋은 산사에서 녹차나 마시고 시나 쓰는 출가자들이 그들 눈에는 좋게 보일리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출가자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체 한적한 산속에서 혼자만 좋으라고 하는 수행은 비실용적이며 현실을 도피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방식의 수행으로 어떻게 속세에서 고통받는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항의한다.
우리가 사는 속세에는 갖은 문제덩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정치적 문제,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 돈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하나가 해결되는가 싶으면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거리가 나타나 우리를 잠시라도 편하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이런 골치 덩어리들과 매 순간 투쟁하며 살다가 때가 되면 쓸쓸히 홀로 떠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우리가 속해있는 속세의 실상이다.
속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것들을 발생시킨 조건들이 소멸되면 더불어 사라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질 않고 인연에 따라 생하고 멸하지만 그 이치를 모르는 우리는 모든 문제들이 항상 우리의 욕구대로 따라주길 바라니 불만족의 끝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세속적 해결방법이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속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이것들도 같이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속세를 오염시키는 근원적인 문제인 잘못된 마음가짐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리 새로운 해결방법을 시도해봐야 그저 표면만 긁을 뿐이다.
속세의 문제들이란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발생한 결과물들이다. 그 결과물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원인에 되어 다시 그에 관한 결과를 맺고 그런 과정은 끝이 없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우리는 그 욕망과 어리석음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으면서도 그런지도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애착, 욕망, 분노, 어리석음의 허황된 꿈속에서 헤매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악몽보다는 길몽을 꾸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선명한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더 나을까?
나는 묻고 싶다.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인지. 탐진치로 뒤범벅된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 궁극적인 진리를 깨닷는 것이 현실을 도피하는 것인가? 수행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현실과 직면하여 그 근본 뿌리를 뽑아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자각하는 것이다. 수행은 왠만한 속세의 시련보다 더 힘들고 보다 더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수행하기를 꺼려한다. 한마디로 수행이 어렵고 힘들어서 회피하려는 게으른 습성 때문이다. 진정한 현실로 다가갈 수 있는 수행은 힘들고 귀찮아서 안하면서 매순간 혼동과 어리석음의 강물에 떠내려 가고 있는 자신들이 마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과연 누가 현실을 도피하는 건가?
우린 항상 감각을 자극한 외부대상을 쫒으며 살아왔다. 그것이 정치던 경제던 아니면 인간관계던 항상 외부대상이 문제였고 그런 외부대상을 탓하며 그 대상들이 우리 비위에 맞도록 따라 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렇게 되질 못할 때 고통을 받는다. 우리를 괴롭히는 괴로움의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우리 내면을 통찰해야한다. 이것은 출세간의 방식으로 수행을 해보지 않은 우리에겐 매우 생소한 것이다. 하지만 내면 통찰만이 우리가 진정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 우리의 내면을 통찰하며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를 때에 우리는 진정 허황된 번뇌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수행에 익숙치 않은 이에게는 결코 쉬운 방법이 아니지만 이 방법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우리들이 수행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자격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스승들이 매우 부족한 것이 지금 불교의 현실이다. 수행 지도자의 부족함과 수행에 대한 우리의 무지 때문에 출가자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찰들도 수행을 위주로 운영되는 곳은 한군데도 못 봤다. 왠만한 불자가 수행에 관심을 갖고 배워보고 싶어도 체계적으로 수행을 지도해 줄 수 있는 스승이 없다. 그러니 불교 승가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현재 불교에선 위빳사나 수행법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있다. 수행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이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고 있고 지금 더 많은 수행처들이 여기 저기 세워지고 있다. 매우 흐믓한 소식이다. 이제 이곳에도 훌륭한 위빳사나 수행처들이 더 많이 세워져 수행에 목말라하는 모든 이들이 담마의 감로수를 마셔볼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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